그는 열정으로 인생 먹구름을 빛으로 만든 벤처인이다. 집안이 몰락해 중2 때 서울로 와 가전수리공을 했다. 그는 이를 ‘고난의 행군’이라고 했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하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교수와 일류 기술자도 못 고친 방사능측정기를 일주일 만에 수리했고 학생 신분으로 본관 1층에 연구실을 배정받았다. 학교 내 모든 교육기자재와 앰프시설을 총괄 관리해 1년에 400만원을 받았다. 대학 3학년 때 한국 처음 소프트웨어(SW)개발업체를 창업했다. 이듬해 번 돈이 1억7000만원이었다.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25억원쯤 됐다.
조현정 비트컴퓨터 회장은 ‘한국 벤처 신화(神話)’로 불린다. 그가 가진 국내 1호 타이틀만 100여개다. 한국 대학생 창업 1호, SW업체 설립 1호, 벤처기업 1호, 병역특례 업체 1호, 오피스텔 창업 1호, 테헤란로 입주기업 1호가 대표적이다. 창의(創意)사고의 결과물이다.
그는 인재양성과 부(富)의 사회 환원에도 앞장섰다. 1990년 8월 비트교육센터를 설립해 SW 인재교육 메카로 만들었다, 2000년에는 조현정 재단을 설립했다. 그는 정치권이 가장 탐내는 영입인사 영순위다.
조 회장을 8월 31일 오후 2시 서울 강남 비트컴퓨터 6층 회장실에서 만났다. 그는 기업인에게 초심(初心) 경영을 당부했다. 젊은이들에게는 “‘스펙’ 쌓기보다는 ‘스킬’이 중요하다”며 “최고가 되려면 남이 하지 않은 일을 하는 창의인재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형 태극기가 눈에 띈다.
-사기(社旗)는 보이지 않고 태극기만 있는데.
▲태극기는 국가의 상징이다. 1997년 11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국가부도 사태가 발생하자 ‘기업가로서 뭘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IMF 다음날 출근하자 태극기를 사오라고 했다. 그날 이후 출근하면 태극기를 만지고 내 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했다.
그의 태극기 사랑은 1998년 2월 MBC ‘성공시대’에도 소개됐다.
-애국심이 남다른데.
▲미국 영주권을 가지고 있던 두 아들은 입대를 안 해도 되지만 모두 군에 보냈다.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어려운 일은 안 하려고 한다. 둘째는 시력이 나빠 4급 판정을 받았지만 눈 수술을 하고 인공렌즈를 넣어 군에 보냈다. 큰애는 육군본부에서 프로그램 개발병으로 근무했다. 제대할 때 참모총장상을 받았다.
조 회장은 역경을 딛고 성공한 기업인이다. 김해 한림면 면장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대지 2000평이 넘는 큰 집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여섯 살 때 돌아가고 집안이 몰락해 열 다섯 살인 1971년 3월 상경했다. 부엌도 없는 단칸방에서 생활했다. 어머니는 바느질을 했고 그는 월급 3000원을 받고 충무로 가전제품수리센터에서 일을 했다. 당시는 가전 3사 대리점이 없었고 당연히 사후관리(AS) 개념조차 없었다. 전파상에서 못 고친 제품을 수리해 ‘꼬마 일류 기술자’로 소문이 났다.
“1973년 여름 제품 수리만 해 줄 게 아니라 내가 설계한 제품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됐다.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공부와 담을 쌓았던 그는 6월부터 3개월간 두문불출하며 공부에 매달렸다. 이웃에서 싸움이 나도 나가지 않았다. 고입검정고시에 합격해 용문고를 졸업하고 인하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했지만 등록금이 문제였다.
학교에 일을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학교시계탑은 시간이 제멋대로였다. 그는 원인을 찾아 디지털로 부품을 교체해 시간을 맞췄다. 학교 측은 당시 교수와 기술자도 못 고친 방사능측정기를 고쳐달라고 했다. 그는 일주일 만에 고쳤다. 학교는 그에게 실습기자재 수리와 관리를 맡겼다. 강의실용 이동앰프도 그가 만들었다. 그는 학교에서 1년에 400만원을 받았다. 학교는 그에게 본관 1층에 연구실을 내줬다. 교직원 통근버스도 이용할 수 있었다.
“당시 동대문구 이문동에서 통근버스가 출발했는데 맨 뒤 의자에 앉아 잤다. 1
|